제조업이 흥했던 시절, 을지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고 활기가 넘쳤다. 창의력 가득한 작가와 디자이너에 의해 다시 을지로 골목이 들썩인다. 을지로의 어제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산림조형 소동호 작가의 을지로 레지던시가 자리한 골목. 한 때 제조업자들이 모여있던 곳에 일부 공동화 현상이 생겼다. 현재 작가들이 청계천 일대를 내 작업실 삼아 사용하고 있다.
제조업의 산실, 다시 찾는 조명 골목
서울엔 충무로와 을지로, 동대문과 종로 일대를 잇는 길을 따라 아주 오래된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이 일대에 크고 작은 제조 산업 단지가 밀집해 있다. 이런 을지로에서 2017년과 2018년엔 특별한 프로젝트가 열렸다. ‘by 을지로 프로젝트’는 을지로 조명 상가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을지로 조명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7년부터 진행 중인 을지로 조명 상가 상인들과 국내 유명 디자이너의 상생한 프로젝트다. 디자이너가 조명 제품을 디자인하고 을지로 조명 업체가 제작과 유통에 참여한다. 을지로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디자이너에게는 유의미한 프로젝트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도시는 살아난다.
수입 조명 중엔 카피 디자인 조명이 꽤 많죠, 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인들이 그걸 변형해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을지로가 경쟁력을 잃어가는듯했죠. 멀리 보면 더 좋지 않을 거예요. 을지로의 조명들이 하나씩 지금의 서울을 말할 수 있는 모습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청계상가는 제조와 유통을 기반으로 을지로 조명 상권이 밀집된 곳이다.
재료와 사람이 만나는 교차로, 을지로
“아마 50년이나 60년쯤 됐을 거예요. 이 거리는 조선시대에 있던 골목도 그대로 남아있어요.” 을지로의 역사를 알고 있는 한국조명유통협동조합 이우복 이사장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문서로는 정리할 수 없는 노하우와 인프라들이 밀집해 있는 이곳은 서울의 디자인 생태계. 오늘 말한 제품이 내일 생산되어 나오고, 종이로 만든 모형으로도 튼튼한 목업 디자인으로 변해 나온다.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이곳에서 재료를 직접 만나기도 한다.
을지로, 오리지널
이 거리 중심가에 ‘을지로 조명 거리’가 있다. 중구 입정동과 산림동 그리고 다시 충무로로 흐르는 세운 청계 상가는 ‘을지로 조명 거리’라고 불린다. 없는 게 없다는 을지로.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을지로 조명 거리의 고민은 ‘다 있고 디자인만 없다’는 고민이었다. 유통과 제작 노하우를 갖춘 전문 업체지만, 수입 디자인 조명에 의존하다 보니 경쟁력을 잃고 있었던 것.
상인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몇 회에 걸쳐 이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을지로 오리지널 디자인을 구현하고, 그것을 하나의 브랜드로 묶어내는 것이 목표라고. “을지로와 디자이너가 협업을 하는 형태의 브랜드로 선례를 남기고 싶어요. 청계천 일대의 작은 조명산업이 변했고, 다른 제조, 유통시장도 변해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어야겠죠. 지속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저희의 큰 숙제예요.”
사람들에게 을지로가 여기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을지로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변화하고 있다는걸요.
소동호작가는 그가 위치한 을지로 산림동에 대한 애정으로 사명을 ‘산림조형’이라 지었다.
디자인과 노하우가 만나 by 을지로
소동호 X 유토조명
(왼쪽부터) 산림조형 소동호 작가와 유토조명 오세웅 대표
작가 소동호의 작업실은 을지로에 있다. 구불구불한 오래된 골목길을 지나, 제조 공장들이 밀집한 바로 옆 구역이다. 2015년 을지로디자인예술프로젝트로 작가 레지던시로 입주했다. 소동호는 2017년과 2018년 ‘by 을지로’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활동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조명업체 유토 조명과 합작한 ‘TRAP’은 구리와 크리스털 소재를 조합한 조명으로 지난 전시에서 주목받았다. 백동, 적동, 황동에 방짜라고 불리는 해머링 기법을 적용하여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과 매치했다.
이전의 ‘by을지로’ 작업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소동호 ’TRAP’은 동판 방짜 작업을 적용해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과 매치한 작업이에요. 유토 조명 오세웅 대표가 크리스털의 화려함을 사용하는 조명 작업을 제안했었죠. 저로선 처음 다루는 소재였어요. 백동, 적동, 황동과 크리스털의 반짝임이 내는 조화를 기대해 디자인했어요. 금속 베이스의 제작은 공예가 김윤진과 협업한 것이고요.
2018년 by 을지로 프로젝트 소동호 디자이너 x 유토조명 출품작 ‘TRAP’
2017년 by 을지로 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인 된 ‘SIBORI SERIES’.
작업의 프로세스가 궁금해요.
소동호 전시까지 3개월에서 5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요, 디자인과 제품을 양산하기에 아주 충분한 기간은 아니지만요. 17년과 18년엔 을지로의 상가와 현업에 있는 디자이너들이 단기간 집중해 만들었어요.
오세웅 소동호 작가와 함께 디자인을 논의한 후, 제작에 필요한 을지로의 인프라를 연결해주기도 하고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조명의 제작과 유통을 담당해요.
함께 작업했을 때 좋았던 것들이 있다면요?
소동호 각 해마다 좋았던 점이 달랐어요. 기존에 구상했던 형태의 디자인을 옻칠 작업으로 마무리해 선보이는 과정에서 제 작업을 발전시켰고 했고, 18년도 작업에서 크리스털을 사용해볼 것을 제안받아 새로운 재료를 만났으니까요.
오세웅 저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디자인 작업을 한다는 걸 몰랐어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놀랐죠. 디자인이라는 게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구나, 알게 됐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에요.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을지로에 또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었다는 점이고요.
‘by 을지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소동호 저는 을지로에 작업실을 두고 4년 정도 활동을 하면서, 지역과 일의 연관성이 깊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이 프로젝트로 을지로에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했거든요. 산업과 디자인 환경을 위해서요.
오세웅 같은 생각이었어요. 한 해 열 개의 새로운 오리지널리티 조명들이 나온다면 거기서 한두 개라도 주목받는 디자인이 나온다면, 이 프로젝트가 더 의미 있어질 것 같아요. 을지로에 걸린 수많은 조명들이 오리지널 디자인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꿈꾸죠. 그래야 유통 업체로서도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왼쪽부터) 소동호 작가와 오세웅 대표.
을지로 조명 골목이 새로운 활기를 갖게 된건 디자인 경쟁력을 불어넣은 디자이너와의 협업 덕분이죠.지난해 파리 메종&오브제 출품에서도 좋은 피드백을 받았으니 이제 국내시장에도 해외 디자인 조명과 견주어도 손색 없는 조명을 을지로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을지로 레지던스를 소동호 작가 작업실 겸 산림조형 사무실과 쇼룸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동호 작가와 유토 조명의 합작은 2019년까지 모두 세 번이 되는데요. 두 분이 다시 작업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오세웅 무엇보다 중요한 것 잘 통한다는 점이죠.(웃음)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바이 을지로 프로젝트가 ‘산업의 문화’를 바꾸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면, 단순히 한 두해 몇 명의 디자이너들과 일해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장기적 구상이 필요한 일이죠. 한 명의 디자이너와 깊은 소통으로 의미 있는 작업을 생산해내는 것이 제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소동호 을지로는 제게 디자인의 생태계이자 영감의 원천이에요. 이런 곳에서 작업을 하고, 을지로를 주제로 오브제 작업을 하는 프로젝트는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좋은 일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늘 관심이 있었죠. 올해는 오세웅 대표님의 ‘한 번 더 합시다’라는 전화 한 통이 시작이고요.(웃음)
을지로는 디자이너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소동호 을지로에는 구할 수 없는 재료가 없을 만큼 구역마다 세분화, 특화되어있어요. 가공 기술도 이곳에 밀집해있죠. 스케치를 가져가거나 말로만 설명해도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니까요. 4-5가지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하루면 끝낼 수 있어요. 원하는 재료를 사러 오는 것만도 아니죠. 재료에 대한 영감을 받기 위해서도 을지로에 와요.
을지로의 제조업 단지가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인 시점이잖아요.
오세웅 요즘은 모이면 그 얘길 해요. 제조업이 없이는 유통업도, 디자인도 있을 수 없는데.
소동호 디자인의 생태계 같은 곳이 사라지니까요. 벌써 입정동 공구상가 건물이 무너졌죠. 오래된 골목과 제조 상인들의 갈 곳이 없어진 모습이 참혹해요. 골목이 사라지면 산업이 사라지고, 그럼 제작비는 올라가게 되요.
오세웅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이 축소되는 거죠. 제조업 골목이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요.
을지로가 을지로 다워지는 길은 무엇일까요?
소동호 변화가 없다고 정체한 것은 아니에요. 식물 같은 느낌이랄까요. 성장하는 느낌이 바로 들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보면 깊은 뿌리도 나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붐벼 울창한, 그런 을지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거 듯해요.